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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원회 칼럼

유니버설 디자인 세상, 상상을 넘어 현실로

2021-09-15

정여랑(소설 『5년 후』 저자)

 

 

“자, 이제 게임을 시작하지.”

영어에 make from scratch라는 표현이 있다. ‘처음부터 직접 다 만들어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상상 속의 세상을 담아 이야기로 만들어내려면 이런 과정이 필요하다. 현실에서 차용해 오는 정보들도 물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백지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야기를 매력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갈등을 배치하고 긴장감을 높이는 방법을 쓴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미 갈등과 긴장감이 넘치고 있고, 우리는 지금 소설을 쓰자는 것이 아니니 다른 것들을 상상해보기로 하자. 물론 우리는 백지의 세상에 살고 있지 않기에 지금을 기준으로 상상하기로 한다. 지금 주어진 현실이 아닌 모든 미래를 가상의 세계라고 했을 때, 우리는 어떤 세상을 만들고 싶은가? 아주 사소한 영역부터 큰 구조까지의 판타지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자는 것이다.

단, 이 상상의 게임에는 한 가지 룰이 있다.

“나를 포함한 누구의 희생도 담보로 하지 않을 것.”

이 룰이 추가되면서 이 상상 게임은 아주 복잡하고 어려운 난이도가 된다. 누군가를 희생시켜야 하는 공포 영화 속 게임처럼 무섭지는 않겠지만, 이 난이도만큼은 현실과의 갭이 클수록, 공포스러울 정도로 높을 수 있다.

유니버설 디자인이 적용된 작은 세상, 서진학교

이건 마치 상상 속 이야기 같지만, 상상 게임 속 내용이 아니다.

발달 장애 학생을 위한 특수학교인 서진학교가 최근 서울시 건축상 대상을 수상했다. 이 학교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졸업 후 2년까지는 전공과까지 모두 한 건물에 있다. 초등학교부터 입학한다고 가정하면 한 학생이 14년 가까이를 이 학교 내에서 배우고 생활하게 되는 것이다.

이 학교의 중정에는 나선형으로 디자인한 의자가 있는데, 층층이 단차가 발생하는 덕에 의자 높이가 다양하고, 휠체어를 타는 아이의 눈높이에 맞춘 화분들도 놓여있다. 기존 학교 복도보다 2배 이상 넓게 설계된 복도는 제2의 열린 교실이나 안정실의 역할을 할 수 있고, 층마다 색으로 동선을 구분하여 아이들의 안전 역시 고려했다. 이런 학교가 많아진다면 장애 유무와 상관없이 통합교육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다.

최근 서울시 건축상을 수상한 서진학교는 발달장애 학생을 위한 특수학교로 유니버설 디자인이 적용됐다.  설계 유종수(코어건축사사무소) ⓒ코어건축사사무소

학교는 아이들이 하루 중, 일생 중 상당한 비율의 시간이 담기는 작지만 어마어마한 세상이다. 한 사람의 인생을 꾸려갈 수 있는 힘이 길러지는 곳이며, 이런 공간 구석구석에 서진학교처럼 유니버설 디자인이 적용된다면 이 아이들이 만들어갈 세상은 좀 더 견고하고, 높은 회복탄력성을 가진 곳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자, 이 글에 미처 담지 않은 수많은 혐오를 극복하고 꿈의 학교가 드디어 하나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학교 밖의 아이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학교에서 안전하게 자라난 아이들이 나와야 할 학교 바깥의 세상은 어떻게 할 것인가. 과연 학교 밖의 세상은 안전하고, 요즘 유행처럼 이야기하는 단어대로 ‘공정’한 세상인가? 우리는 이미 상상 게임을 계속해 오고 있다.

유니버설 디자인이 적용된 생애를 상상하기

저출생 현상은, 아이를 낳고 기르는 주체들이 아이를 낳아 키우기가 힘든 세상이 되었다고 판단했다는 것을 극명히 보여주는 현상이다. 이것은 단순히 임신, 출산, 육아기에만 걸친 문제가 아니다. 교육 현장의 문제, 사회적 갈등, 범죄율, 나아가서는 가시적으로 도래해 온 기후 위기 문제에 이르기까지, 아이를 낳고 키우는 주체들이 그러한 요소들을 고려했을 때 낳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하기 시작한 것이다.

Universal Design(유니버설 디자인)은 다양한 사용자를 고려한 보편적인 디자인으로, 성별, 연령, 국적(언어), 문화적 배경, 장애 등에 상관없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이나 환경을 만드는 디자인을 말한다. 이 디자인이 우리의 전 생애에 적용된다고 상상해보자.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으니까 이번에는 백지에서 시작해 보는 것이다. 단, 앞서 제시한 룰을 계속 유념해야 한다. “나를 포함한 누구의 희생도 담보로 하지 않을 것.”

이 상상 속 세상에서는 누구나 아이를 스스로의 온전한 선택에 의해서 갖는다. 현실의 세상에서도 그렇지 않으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누구나’ 자신의 ‘온전한’ 선택에 의해 아이를 갖고 있지 않다. 갖지 않을 권리조차도 지난한 과정을 거쳐 이제 겨우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 현실이다.

낳고 기르는 주체들의 온전한 선택을 위해서는 임신, 출산, 육아, 교육에 이르는 모든 부분에 대한 사전 지식이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그리고 그 주기에 맞게 단계적으로, 지속적으로 충분히 학습되는 환경이 우선 주어져야 한다.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이기적인 것’이라든지, 아이를 낳는 것이 ‘애국을 하는 일’이라거나 ‘어른이 되는 일’로 프레이밍만 하는 문화는 저출생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같은 맥락으로 성과 재생산권에 대한 교육이 단순히 임신과 출산에만 맞춰져있는 것이 아니라, 전 생애 주기에 걸친 신체와 심리의 변화, 그리고 주변 환경의 변화와 그에 대한 대처까지를 학습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성별과 연령, 교육 환경에 무관하게 모두에게 주어져야 하는 보편적 교육이자 복지로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처럼 많아야 반기에 한 번 이루어질까 싶은 학교나 기관 내 교육으로는 전체를 아우르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이미 세상에 나와 있는 아이들도, 양육 당사자들도, 양육을 직접적으로 하고 있지 않지만 함께 사회를 구성해가고 있는 다른 구성원들까지도, 이 세상이 아이가 안전하게 만들어지고 태어나서 자라기에 좋은 곳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저출생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유니버설 디자인이 적용된 생애라는 상상은 이런 것이다. 한 사람이 양육자의 주체적 선택에 의해 만들어지고, 안전하게 임신·출산·양육기를 보내고, 학교 제도권의 구분에 상관없이 개인의 특성에 맞는 통합교육을 받는 것이다.

또 신체적·정신적 특성에 맞는 생활을 할 수 있는 사회적 인프라가 갖춰져 있고, 생애 주기나 그 외 변화에 따른 다양성에 맞추어 경력을 만들고 이어나가면서, 임종의 시기에도 본인을 포함한 주변이 함께 그 과정을 준비하고 마무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세상 안에서 우리의 상상은 현실로 가능해질 수 있다.

제4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 계획에서 우리는 이 상상의 구체적인 모습과 가능성을 본다. 정책연구와 계획이 추진되고 실행되는 과정들이 쉽지 않겠지만, 이러한 상상들이 머릿속의 상상 게임으로 그치지 않고 조금씩 현실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은 고무적이다.


유니버설 디자인이 적용된 생애를 상상해보자. 전제는 나를 포함한 누구의 희생도 담보하지 않는 것이다. 

 

상상 게임을 지속하기

우리는 이미 시작된 이 상상 게임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내가 살고 싶은 세상에, 내가 만들어가고 싶은 세상에, 나는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나의 복지를 위해 누군가의 희생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가. 혹은 누군가를 당연히 희생시키고 싶어 하지는 않은가. 저마다가 가진 기득권의 무게를 확인하는 일, 지금의 우리와 다음 세대의 지속을 위해 어떤 방향의 삶을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는 일, 그렇게 우리의 상상과 자각이 나아가서는 실천하는 삶에 이를 수 있도록, 이 상상은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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