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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웹칼럼

[7화] 노년들의 이야기를 듣고 예술로 표현하는 '이야기청'의 총괄기획자 육끼

2020-12-29

이야기로 잇고 이야기로 짓습니다 

 

 

  

이야기청의 청년 작가들과 함께. 안경 쓴 이가 인터뷰에 응해준 육끼 씨다. 

 

 

1. ‘이야기청’을 아십니까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머니들의 얼굴은 묘하게 아름답다. 웃을 때마다 물결처럼 움직이는 그 주름들은 길게 이어진 밭의 이랑과 고랑을 연상시킨다. 밭을 옆에 끼고 1시간을 걸어서 학교에 다녔던 유년기의 추억 때문인가, 나는 밭의 이랑과 고랑이 만들어내는 굴곡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할머니들의 주름을 볼 때도 비슷한 안도감을 느낀다. 밭의 이랑고랑도, 할머니들의 주름도 아주 평범하지만 들을수록 찰지고 구성진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이야기들의 아카이브인 것이다. 노년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그래서 삶의 최전선인 주름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고, 동시에 이야기가 된 삶을 만나는 것이다. 노년들과 퍼더버리고 앉아 담소를 나누는 일이 사라지면서, 이 아카이브가 품고 있는 이야기들도 잊히고 있다. 

그런데, 노년들을 만나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청년들이 있다. 6개월이고 8개월이고 만나 이야기를 듣고 감각하고 이해하고, 그것을 나름의 형태로 표현하는 ‘일’을 하는 청년 작가들이다. 이들의 작업은 ‘이야기청’이라는 이름의 프로젝트 하에 진행된다. 올해 이야기청의 작업 결과는 <사사이람> 전시회에서 대중들에게 소개되었다. 코로나19 재난 때문에 전시공간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2시간으로 제한되어 있었고, 그 공간 안에서 각각의 고랑이랑을 이룬 이야기들은 결코 2시간으로 다 들을 수 없는 인생의 굽이굽이로 풍요로웠다. 내용이 단단했고, 형태면에 있어서도 사람들의 감각을 일깨우는 측면이 확실했다. 겉멋 아닌 속멋이 은은했다. 자신들이 만난 노년들의 삶과 자아를 잘 보여주려는 노력이 느껴져서, 기뻤다. 2시간이 너무나 빨리 지나가버려, 코로나가 할머니 할아버지들 이야기 듣는 것도 방해하는구나, 한숨 쉬며 떠밀려 나왔다. 저 이야길 언제 또 듣나, 아쉬움에 몇 번이고 뒤돌아보았다. 이야기청을 총괄기획하고 있는 육끼 님을 만나1)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그 뒤돌아봄에 대한 보상이고 위로이기도 했다. 

 

​‘이야기청’은 젊은 문화예술 작업자들이 ‘노년들’을 만나 그들의 인생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나름의 예술 형태로 전환시키는 작업 커뮤니티/프로젝트의 이름이다. 영상, 사진, 공연예술, 사운드아트, 구술연구, 커뮤니티아트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하고 있는 청년 예술가 및 기획자들이 연도별로 다르게 합류한다. 올해가 4년차다. 

‘이야기청’은 이야기와 청(듣다)의 합성어다. 청은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늘 푸르른 모두의 모든 삶’을 가리킬 수도 있을 것이다. 처음 ‘청’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공개적으로 마련된 널찍한 마당을 떠올렸다. 공공의 의미를 앞세워 마련한 ‘장’이지만 초대된 사람은 편안하게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는 곳. 듣는 사람과 말하는 사람 사이에 민주적 평등이 고르게 흐르는 이곳은 아렌트(Hannah Arendt)가 상정한 정치적 주체들의 공간을 닮았지만, 화자의 말이 꼭 정치적 견해일 필요는 없다. 아니 정치적 견해가 아닌, 수십 년 호미질을 하며 삶을 지은 이랑고랑의 이야기니 더 융숭하고 더 감칠맛이 있다. 이야기청, 한번 들으면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연상되는 이미지도 자못 명료하다. 머리가 하얗게 센 늙은 이야기꾼 주위로 젊은이 어린이 중늙은이들이 빙 둘러서 있다. 이렇게 되면 ‘청’은 아렌트식 정치적 주체들의 무대에서 구술문화 시절의 마을 입구 정자나무 아래나 장터의 술청으로 슬며시 이동한다. 대부분의 소통이 손가락 움직임으로 이루어지는 전자촉각 시대에 이 물리적 몸들과 목소리의 현전은 남다른 감회와 의미를 선사한다. <사사이람> 전시를 보고나서 육끼 님을 만나러 갈 때 나의 감각은 1차 산업시대와 4차 산업시대 사이에서, 2-30대와 6-80대 사이에서 진자운동을 하고 있었다.   

 

2. 이야기/청의 가능성, 타인의 삶에 대한 호기심과 소통의 욕망에 있다 
 

​노년이라는 타인의 삶을 경청하고 소통하고자 했던 젊은 창작자들의 작업이 <사사이람> 전시에 담겼다.

​이야기청 작업에 참여하는 작가들은 노인심리나 노인행동연구, 노인 인지장애, 또는 구술작업, 커뮤니케이션 등에 대해 전문가의 견해를 듣는 시간을 갖는다. 워크숍을 하며 토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야기청의 프로그램은 타인의 삶에 대한 관심과 소통의 욕망이라는, 창작자들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특성에서 출발한다. 이것은 창작 작업이고 따라서 어떤 노년을 만나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를 들을 것인가는 전적으로 작가들의 선택이다. 그러나 모두가 공유하는 기본 지향점은 있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사람의 일상을 통해서 그 사람만의 특별하고 귀한 면모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예술가들은 타인의 삶에 관심이 있고, 소통의 욕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청 작업에 대한 기본 공통감각 같은 것은 그 안에서 만들어진다고 생각하구요. 대단한 사람들에 대한 뛰어난 서사, 이런 건 저희 말고도 잘하시는 분들이 있을 테고, 저희 이야기청은 일상적인 만남을 통해서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상호작용을 하는 예술을 기대하고 있어요. 본질적으로 예술 자체가 삶을 들여다보고 관찰하는 것이니, 권위니 패권이니 대의적인 목표니 그런 게 아니라, 보통의 어떤 삶, 보통의 일상을 탐구하고 들여다보자는 거죠. 작년에는 쪽방촌이나 복지관에 계신 분들, 길에서 고양이밥을 주시는 할아버지 등, 다양한 형태의 노인분들을 만났어요. 보통의 노인들을 만나 그분들이 귀하고 특별하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은 거예요. 언젠가는 우리들의 목소리도 들리겠지, 라는 희망도 가지면서. 우리도 평범한 사람들이니까요.”

이야기를 듣는 일에는 어떤 기술이 필요할까? 나의 질문에 그는 ‘기술이라기보다는 태도’라고 말했다. 소통하겠다는 태도가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그 방법을 찾아낸다는 것이다. 이야기청 작업의 핵심은 그 방법을 찾아가는 과정과 관계다. ‘결과를 어떻게 하자!’라는 것은 요구되지도 언급되지도 않는다. 4년 동안의 프로그램 진행에서 특별한 소수를 빼고는 작가들 모두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었고, 결과는 자연스럽게 나왔다. 작가들은 ‘삶에 대한 관심과 관찰력’이 뛰어나다. 이들은 자기만의 방법과 감각으로 나이 든 타자들의 이야기에 반응하며, 이야기가 이어지게 만든다. 할머니들도 ‘예술가’에 대한 호기심과 관대함으로 반응한다.

쌍방향으로 작동하는 호기심이 마중물이 되어 대화의 물꼬를 트고,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낸다. 말하자면 궁합이 좋은 것이다. 예술가들을 좀 신기하게 바라보는 할머니들은 ‘밥은 어떻게 먹고 다니냐’, ‘이래서 장가는 가겠냐’ 라며 관심을 보인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약자로 살면서 평생 단련시키고 키워온 감각이나 촉으로 할머니들은 작가들의 말 걸기나 상황에 은근하면서도 민활하게 반응한다. 할머니들의 반응에 다시 작가들이 반응하고, 그렇게 주고받아진 반응들에 탄력을 받아 이야기가 풀려나오기 시작한다. 관계의 다리가 놓이고 집이 지어진다. (할머니의) 이야기로 지어진 집이고, (관계의) 이야기가 깃드는 집이다. 전시장을 찾은 노년들 중에는 첫 작품에서부터 ‘나 너무 슬퍼… 눈물이 막 줄줄이야’ 라며 우시는 분도 있다. ‘자기 경험에 비춰’ 작품을 느끼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야기청의 작업들이 이분들의 감정 선을 그렇게 즉각적으로 건드릴 수 있다는 것은 작가가, 할머니가 들려준 삶을 그만큼 깊이 이해하고 잘 형상화했다는 뜻이다. 

할아버지들도 참여하시나요? 계속 ‘할머니’를 주어로 이야기했다는 것을 문득 깨닫고 내가 물어봤다. 그는 간단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95 퍼센트 정도가 할머니들이세요. 일단 할머니들이 더 장수하시고, 팔십 넘으신 할아버지를 만나기가 힘들어요. 이번 전시에 등장한 할아버지들은 귀한 할아버지들이신 거죠. 그리고 할아버지들은 이야기를 하기 보다는 가르쳐주시려 해요. 단편적인 예로 저희 아빠만 봐도 반응이 엄마와 완전히 다르세요. 두 분이 군산에 사시는데 엄마는 ‘군산에도 이야기청이 있으면 나도 열심히 참여하고 싶다’고 말씀하세요, 너무 좋은 기회라고. 그런데 아빠는 ‘내가 거길 왜 가? 내가 이 나이에 거길 가서 왜 누구 말을 듣고 있어? 이렇게 말씀하세요. '내 맘대로 할 거야' 이런 태도가 좀 있으시니까, 나오게 될 경우 몇 시에 나오시면 된다, 이런 것도 다 누구 말을 듣는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이야기꾼이 되지 못하는 할아버지들 때문에 초고령화가 진행되는 한국사회에서 노년남성의 이미지는 점점 더 획일적으로 굳어진다. 태극기를 들고 시청 앞으로 나가는 사람이거나 탑골 공원이나 다리 밑에서 바둑 두는 사람, 이 두 유형으로만 각인되는 노년남성 이미지는 쉽사리 차별이나 혐오로 이어질 수 있다. 살아온 인생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도 훈련이 필요한 기술이다. 50+ 같은 기관들은 나이 드는 남성들의 스타트업 지원에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이들을 위한 ‘이야기꾼 교실’을 열어야 하는 것 아닐까. 

3. 할머니들의 자아를 만나다 : 이야기청 작업을 하며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


 

  

할머니와 함께 한 청년 작가들. 나이듦과 노년에 대해 마음을 열고 잘 듣는 게 기본이라고 한다. 

 

​이야기청에서 작업한 젊은이들은 노년들과 6개월 넘게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이듦과 노년에 대해 피상적으로 생각했던 것들, 어쩌면 자세히 알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잘 알지 못했던 것들을 점점 더 잘 알게 된다. 예를 들어 ‘지금과 같은 형태의 사회 속에서는 노년들이 친구나 동료를 갖기 어렵겠’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할머니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사람들과의 관계가 뭔가 표피적이라고 느껴졌다. ‘계속 경쟁했고, 계속 포장했던 관계’였고, 그러다보니까 진정한 친구나 동료가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노인복지관이나 문화센터 같은 곳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우리 집은...’, ‘우리 자식들은...’ 식의 이야기들을 주로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톡방을 매개로 한 노년들의 사회교류 연구나 경로당 이용 연구에서도 등장하곤 하는 주제다. 자식이 어느 직장에 다닌다, 용돈을 얼마큼 준다, 어디 여행 가자고 한다, 등 자랑거리가 있다면 노년들은 노골적으로 또는 은근히 반복해서 말한다. 자랑할 거리가 없는 사람들은 저들의 ‘자랑놀음’을 그러려니 하며 들어주다가도 가끔씩 짜증이 치솟아 일정 시간 단톡방을 탈퇴했다가 다시 들어가기도 한다. 아예 경로당 가는 것을 그만 두는 노년들도 있다. 자식을 매개로만 사회적 정체성을 얻을 수 있었던 노년여성들의 경우 이런 경향은 더 심할 수 있다.

 

​이야기청 작가들이 의외라고 생각한 또 다른 발견은 노년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과거나 추억보다 미래에 대한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이다. 88세의 한 노년은 “저는 앞으로 5년은 더 살 거 같은데” 라면서 그 5년에 이루고 싶은 자신의 꿈을 말하기도 했다. 여행 가고 싶다, 떠나고 싶다는 많은 할머니들의 공통된 소망이다. 늘 배우고 싶었던 영어를 배우는 것, 컴퓨터를 배우는 것 등 다양한 배움의 갈망도 있다. 그리고, 이 미래의 계획 바로 옆에는 꿈만큼이나 구체적인 죽음 준비가 있다.

“나름대로 매우 건강하게 죽음 준비를 하고 계시더라구요. ‘어떻게 죽었으면 좋겠다’부터 시작해서, ‘물건을 빨리 버려야 내 자식들이 고생하지 않지’라며 물건 정리를 말씀하시고. ‘장기기증을 내가 하면 도움이 될까.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지만 신청은 해봤어’, 하시고. ‘돈도 얼마 없지만 내가 죽은 다음에는 이 돈은 어떻게 쓰였으면 좋겠어.’ 그리고 장례 방식 같은 것도 종종 얘기 하시죠. ‘요즘에는 수목장도 있던데?’ 같은 얘기들도 꽤 자연스럽게 하세요. 놀랍게도 ‘나는 지금이 제일 좋은데’ 하는 할머니들이 많으세요. ‘이제 고생 다 하고나서 몸은 아프지만, 지금이 제일 행복한 것 같애. 이렇게 살다가 죽었으면 좋겠어. 요양병원 안 가고 죽었으면 좋겠어,’ 라고 말씀하세요.” 

4. “이야기란 삶을 나누고 연결하는 것입니다”

이야기청은 보통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총체적으로 보려한다. 그들이 만나는 노년들은 대부분 70이 넘어서도 일을 하는 사람들, 고단하고 어려운 삶을 여전히 꾸리고 있는 사람들이다. 한가하게 이야기나 풀어놓을 형편이 아니다. 시간을 두고 조금씩 관계가 형성되면서 곁에 있는 사람이 믿을만해질 때 이들은 기꺼이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러나 노년들만 변화하는 게 아니다. 작가들도, 기획자들도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는 ‘여럿’의 원 안에서 더 긴밀하게 연결된다. 파트너 노년과, 다른 작가들과, 스탭들과, 그리고 다른 작가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친근감을 느끼게 되는 노년들과, 심지어 파트너 노년들의 지인들과, 협력하는 지자체의 행정직원들과. 계속해서 이 ‘여럿’의 원은 다면적으로, 다층적으로 관계의 망들을 만들어 나간다. 노년이든 그들의 삶이든 ‘덩어리’로 바라보지 않고, 특별한 이야기를 갖고 있는 개별 사건으로 접근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육끼 씨는 이런 성격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청의 활동을 “되게 신기한 작업”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밥줄> 영상물을 만든 김선교 작가와 <워크맨> 동영상을 만든 채병연 작가의 작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어지고 연결되는’ 이야기/청 작업의 특성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전시회에는 작가들의 작업후기를 소개하는 영상이 있었다. 이 영상에서 작가 김선교는 옷 만들고 수선하는 할머니와의 만남을 ‘만남 자체가 뭔가에 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하고 심장이 쿵쿵 뛰는 발견’이었다고 말한다. “나는 백화점 옷을 사 입은 적이 없어. 그건 내 자존심이야. 나는 옷을 만드는 사람이니까. 백화점에 가서 마음에 드는 옷을 발견하면 그걸 사다가 다 해체해, 그래서 어떻게 만들었는지 그 패턴을 연구해. 그걸 내 작업에 적용하지.” 할머니는 이렇게 도도하게 말씀하셨다 한다.

 

“시장에 있는 오래된 작은 수선 가게에서 지금도 일을 하시는데, 그분 마음속에 그런 중심 줄기가 쭈욱 이어져왔던 거죠. 그 자존심이 할머니가 움직이는 동기부여가 되고, 가게를 유지하는 힘이 된 거죠. 시장에 계신 분들이 누가 와서 얘기 들어준다고 ‘아 고맙습니다. 나는 외로우니까’ 하지 않잖아요. 보통 가면 다 대차게 여러 번 채이고, 또 찾아가서 얘기하고, 다시 또 찾아가고. '징그러 징그러' 하면서 마음의 문을 열어주신 건데 그때 나온 얘기들이 할머니를 알아보게 만든 거예요. ‘아, 할머니는 이런 생각을 하시면서 여기서 일을 하셨구나!’ 그걸 자신의 작업에서 재구성한 거죠. 할머니도 작가를 통해서 마음의 문을 열었고, 작가도 할머니를 통해서 마음의 문을 여는 그런 띵- 한 전반적인 과정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2)


"어제에서 내일을, 노인에서 청년을, 일상에서 예술을, 상처에서 공감을, 사람 사이를 이야기로 이어봅니다. 우리는 이야기의 힘을 믿습니다" 

(사사이람 전시)   

 

​<워크맨> 작업에서도 열리고 이어지고 연결되는 이야기청의 특성은 확연했다. <워크맨>을 보면서 나는 무엇보다도 뚜벅이 택배기사로 일하는 노년남성 마음의 이중 구조를 포착해낸 작가의 세심한 관찰에 주목했다. 야구 모자를 쓰고 뚜벅이 택배기사로 일할 때는 ‘비즈니스맨’의 자신감을 내보이지만, 일이 끝나 야구 모자를 벗고 피곤한 눈을 쓸어내릴 때는 늙은 ‘할아버지’로 돌아가는 노년남성의 모습을 잘 짚어냈다. 외국에 사는 자녀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리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영상에 담을 수 있었다는 것은 작가가 그 노년남성과 그만큼 가까웠다는 증거다. 육끼 씨는 그가 매우 성실한 작업자라고 말한다. 그는 할아버지랑 술도 마시며 친구처럼 지냈고, 할아버지는 가족들이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이런 할아버지를 위해서 그는, 자식들에게 대놓고 말하지 못했던 마음을 담은 영상편지를 따로 만들고 있는 중이다. 그뿐이 아니다. 할아버지가 일하는 송파 뚜벅이 택배 홍보 영상도 만들어드릴 계획이다. <위크맨>에서 뚜벅이택배 기사에서 외로운 할아버지로 돌아와 눈물 흘리는 한 노년남성의 이야기는 이야기청 멤버들을 울게 만든다. 

“작업 과정 안에서도 같이 울고, 그렇습니다. 그런 얘기들이 우리 안에서는 또 사건과 이야기가 되어서, 이후에 할아버지랑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지, 이야기청이 어떻게 협력하면 좋을지 이런 얘기들로 귀결되죠.”
 

​이야기청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이야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떠올랐고, 동시에 답도 같이 떠올랐다. “이야기란 삶을 나누고 연결하는 것입니다.” 육끼 씨는 나중에 내게 보낸 메일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의 메일을 읽는데 나도 모르게 슬며시 웃음이 번졌다. <사사이람>에서 보고 들었던 다양한 이야기들과 그 이야기들이 만든 연결망들, ‘사이의 집들’이 떠올랐다. 연결이 연대가 될 수 있을까. 연대가 될 수 있게 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육끼 씨와 나눈 이야기청의 이야기는 우리를 이 질문으로 이끈다. 단초들은 여기저기에 있다. 

65세부터 경로우대 하는 건 정부가 돈을 너무 낭비하는 거 아닌가, 생각했다는 한 40대 후반 관람객은 <사사이람>을 보고 난 후, “아, 지하철이 공짜니까 이렇게 밖으로 나와서 사람들도 만나고 건강한 활동도 할 수 있구나, 다 이유가 있는 거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나와 같은 날 전시회장을 찾은 한 남자대학생은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라고 말했다. ‘한분 한분의 이야기를 자세히 살필수록 부모님을 더 깊게 이해하게 된다. 본가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일 년에 두세 번 밖에 못 가는데, 부모님이 그립다’며 그는 내게 울컥 하는 심정을 고백했다. 전시장을 찾은 노년들 중에는 첫 작품에서부터 ‘내 이야길세, 내 이야기야’라며 눈물을 줄줄 흘리는 분도 있다. 

 

세대 간 갈등이라는 정치게임에 에너지 쏟지 말고, ‘노년들의 삶에 예술로 공감하는 이야기 집’을 여기저기 짓자고 제안하고 싶다. ‘예술’은 저 좋아서 하는 일 아니냐며 열정 페이로 청년 작가들을 착취하지 말고, 그들이 내장하고 있는 ‘타인에 대한 호기심’과 재기발랄한 상상력을 노년들과의 협업에 쏟게 만들자. 모든 구 단위로 지자체가 적어도 한 집씩은 짓기로 한다면 청년 작가들은 지역에 뿌리 내린 활동에다 할머니 친구들까지 생기니 기쁘게 나서지 않겠는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누릴 자부심과 즐거움은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여섯 달, 여덟 달을 드나들며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곁이 되어주는 청년들을 어디서 만나겠는가, 더구나 ‘예술가’ 청년들을.


  

5월 전제 워크숍에 모인 이야기청의 작가들

 

 

​5. 할머니가 된 나는 이런 일을 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육끼 씨에게 미래에 어떤 할머니가 되고 싶은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어보았다. 

“이건 제가 평상시에도 하는 말이예요. 제가 올해 마흔 여섯이니까, 24년 정도 활동하면 일흔이거든요? 활동 더 하고 70이 되면 이야기청 할머니로 이야기하고 싶은 게 제 꿈이예요. 만일 제가 그 30년 동안 이야기청 활동을 했다고 하면 이야기청하면서 배웠던 삶의 지혜들을 멋있게 나누고 싶어요. 제가 말도 잘 못하고 부끄러움도 많아서, 인터뷰하거나 노출되는 거를 두려워해요. 그런데 그때쯤 되면, 그래도 일흔이 됐으니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요? 그때 다시 편안하게 선생님하고 이런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때 이렇게 만나서 나이 듦에 대해 이야기하면 참 좋겠다, 그때는 자연스럽게 술술 얘기할 수 있겠다고 말이죠.” 

육끼 씨가 70살 되어 편안하게 인터뷰를 할 수 있을 때쯤이면 나는 87살이다. 그때까지 (생물학적으로나 인지능력으로나) 청력이 쓸 만하다면 해볼 만한 인터뷰일 것이다. 어쩌면 나도 그전에 이야기청의 초대를 받아 내 살아온 내력을 젊은 작가의 손바닥 안에 소복이 털어 놓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어떻게 아프고 어떻게 늙어갈지는 내 몸, 내 정신이라도 알 수 없는 일. 어찌되었든 이야기청도 육끼님도 잘 ‘나이 자시길’ 빌어드린다. 그때쯤이면 그의 꿈인 ‘이야기 담는 집’도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을 터다. 

 

사진_이야기청 제공

글_김영옥(옥희살롱 공동 대표·《노년은 아름다워》 저자) 

 


 

1) ‘육끼’님에게 본인 소개를 부탁했더니 이런 말을 들려줬다. “저는 노인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려고 하고, 노인들의 삶을 잘 배우고 싶은 토끼입니다. 육끼라는 제 이름은 육식토끼의 준말입니다. 제가 토끼띠거든요. 육식을 잘하고 좋아해서 육식이라기보다는 새로운 토끼? ‘토끼’라는 정체성으로 비틀어 보고 싶은? 그런 의미에서 육식토끼입니다. 개인적으로 토끼 아이템을 모으고 있어요. 환갑이 되면 제가 모은 컬렉션으로 전시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습니다.” 

2) 이 도도한 할머니의 이야기는 김선교 작가의 <밥줄>에 담겨있다. 47분짜리 영상물 ‘밥줄’에는 할머니 말고 시장에서 가방을 파는 한 할아버지의 이야기도 담겨있다. 이 할아버지는 말 그대로 백 퍼센트 ‘이야기꾼’이다. 지면 때문에 더 길게 소개하지 못하는 게 정말 안타깝다. 많은 사람들이 ‘밥줄’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간절히 바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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