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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웹칼럼

[나는 니가/내가 애틋해] 에필로그 - 늙은 사람, 젊은 사람, 아픈 사람 : 이렇게 서로 도반이 되어준다

2021-01-13

 

1. 우연히 마주친 그 늙은 사람, 늙어가는 일에 모델이 되어준다 

나이 드는 일은 좌충우돌과 자기 배신, 놀라움을 동반한 호기심과 무력감 등 매우 다양한 상황들과 감정들의 스펙트럼을 제공한다. ‘나는 안 그럴 줄 알았는데…’에 통쾌한 펀치가 날라드는 경험도 왕왕 있다. 예컨대 5년이 넘도록 자동적으로 누르던 현관문 번호, 어제 귀가할 때도 손가락이 알아서 척척 눌러주던 번호가 오늘 갑자기 하얗게 사라진다. 어제와 오늘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사이에 갑자기 뻥 뚫린 이 심연은 뭐지? 이런 심연과의 마주침은 마음근육이나 체력이 있을 땐 흥미로운 수수께끼지만, 우울감이 먹구름처럼 심장을 누를 땐 감당하기 힘든 좌절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는 적응과 성장 중에서도 늙어가는 일이야말로 절대적으로 적응과 성장을 요하는 일임을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주, 아주 자주 깨닫는다. 


아픈 몸이나 늙은 몸, 장애가 있는 몸이 느리게 천천히 협상하며 살 수 있는 문화적 물리적 환경이 우선해야 한다. ©Photo by Raychan on Unsplash

 

 

-굼뜬 노친네들?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지’ - 이 말은 나이 듦의 적응과 성장에도 잘 들어맞는다. 신기하게도 살면서 우연히, 이곳저곳에서 스치듯 만났거나 흘끗 보았던 ‘선배 노년’들의 모습이 불쑥 나타나 내 나이듦의 학습여정에 적절한 모델이 되어준다. 

 

몇 개의 예를 들어보자. 노년에 대한 상투적인 이미지 중 하나가 ‘굼뜨다’인데, 이것은 노년의 몸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 노년의 정신에도 해당한다. ‘빨리빨리’가 최고 심급인 한국 사회에서 ‘느릿느릿’이나 ‘천천히’도 아니고 ‘굼뜨다’는 상당히 부정적인 의미를 띤다. 그런데, 실제로는 ‘날쌘’ 노년들이 꽤 많다. 방송 프로그램 <자연인>에 나오는 사람들을 말하는 게 아니다. 

 

40대 중반에 친구와 계룡산으로 겨울 나들이를 간 적이 있다. 계룡산 동쪽 자락에 있는 동학사를 들러 서쪽에 있는 갑사로 넘어가는 여정이었다. 이틀 전 내린 눈이 강추위에 얼어붙어 동학사에서 갑사로 넘어가는 산길은 미끄럼틀 그 자체였다. 부랴부랴 값싼 아이젠을 사서 등산화에 걸고 엉거주춤 기다시피 내려가고 있는 우리 옆으로 어떤 할머니 한 분이 통통 ‘튀듯이’ 날렵하게 지나갔다. 옆집에 마실 나온 것처럼 평범한 스웨터에 ‘고무신’차림이었다! 고무신을 신고 미끄러운 눈 비탈을 가볍게 통통 뛰어 내려가는 할머니라니, 경이롭다 못해 신비로웠다. 유난히 몸이 무겁고 움직임이 굼뜨다고 느낄 때면 그 때 그 할머니를 떠올린다. 부럽다거나 경쟁심이 생겨서가 아니라 기분 좋은 자부심이 생겨서다. 그렇다고 민첩함이나 날쌤을 추앙한다는 건 아니다. 민첩함이나 굼뜸을 연령과 엮어 은근히 연령차별을 정당화시키는 비논리가 부당해서다. (이 비논리를 가볍게 물리친 그때 그 할머니는 지금도 하늘 위에서 통통통 이곳저곳을 날아다니고 있지 않을까.) 

몸이건 정신이건 굼뜬 건 부정적인 것도 아니고, 더구나 노년에게만 해당되는 것도 아니다. ‘느릿느릿’의 리듬을 용납하지 않는 속도-발전주의가 빼앗아 간 반성적 내면이나 자율, 정서, 특정한 일의 속성이 얼마나 많겠는가. 아픈 몸이나 늙은 몸, 장애가 있는 몸이, 느리게 천천히, 자율과 의존의 감각을 적절하게 협상하면서 살 수 있는 문화적·물리적 환경이 우선해야 한다. 그래야 서로 다른 연령대가, 서로 다른 몸들이 공존할 수 있다. 물리적으로 현존하는 이 다른 몸들이 평등하게 서로 ‘몸’의 지각이 되어주는 사회가 민주주의 사회다.

노년의 몸이 특히 속도에 있어 제멋대로 조종되지 않는 특징을 나타낸다면 그 몸은 다른 생애단계에 있는 이들에게도 적용 가능한 반성의 토대다. 노년은 다르게 체화되고 있는 몸 감각에 입각해, 파행으로 치달은 속도 발전주의 근대의 오류를 성찰하며 몸 움직임의 속도와 감각을 다시금, 천천히, 자연의 속도에 맞출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자연의 속도도 이미 너무나 인위적으로 조정되어 왔다.) 경쟁을 내재적 원칙으로 삼는 발전주의 시스템 안에서 시간을 ‘달리는’ 마라톤 주자들의 세계 속에서 노년의 느린 몸은 시간을 ‘되새김질하며’ 시간을 ‘산다’. 

 

우리는 지금 손가락 클릭 한 번이면 어마어마한 크기의 데이터나 구조물도 순식간에 사라지게 할 수 있는 디지털 생산-소멸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 새로운 시대에 지배적인 ‘클릭의 속도’는 전자화된 감각/정동과 함께 특이한 가상현실을 가동시키고 있다. 그러나 체화된 의미, 데이터로 전환되지 않는 체화된 경험은 말 그대로 몸이 필요하다. 그리고 몸들의 대면과 접촉은 느린 시간과 함께 느끼는 장소를 필요로 한다.

대면과 접촉을 금지시키는 코로나19 재난시기를 통과하며 우리가 통렬하게 깨닫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하니 ‘디지털 시대정신’에 ‘거스르는’ 몸들의 감각에 주목하자. 그러니 ‘노친네들의 굼뜬’ 몸/정신이라고 부르지 말고 노년들의 천천히 움직이는 몸/정신이라고 부르자, 그 차이에 자기반성적 호기심을 보내자. 

​외로운 노친네들?
 

©travis-essinger on splash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30대 초반, 토요일 아침마다 달리기를 하러가던 운동장에서 마주치던 늙은 사람의 이야기다. 키 크고 마른 몸의 그는 비스듬히 기운 나무처럼 허리께와 어깨 부분이 살짝 옆으로 기울어 있었다. 나이가 꽤나 많아 보이는 그의 얼굴에는 뭐라 확정지을만한 표정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무표정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그의 표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묵묵히 늙어가는, 고독한 얼굴’이 아니었나 싶다. ‘외로운’ 얼굴이 아니라 ‘고독한’ 얼굴 말이다. 회한도 없고 희망도 들이지 않는 얼굴. 매우 느리게 작은 보폭으로 천천히 앞을 향해 나아가는 그의 모습은 달리는 사람의 영상을 최저 속도로 재생시키는 것처럼 보였다. 깊숙이 나이 든 몸에 시간과 공간을 적응시킨 결과이리라. 내가 도착했을 때면 그는 아무도 없는 트랙을 그렇게 슬로모션으로 달리고 있었고, 10바퀴를 다 뛰고 헉헉대며 내가 운동장을 떠날 때도 그는 그 모습 그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달리기, 아니 움직임은 언제 시작해서 언제 끝나는지? 아니, 끝나기는 하는지? 비스듬히 선 고목이 원을 그리며 천천히 움직이는 것 같던 그의 모습은 요즘 내 산책길의 동반자다. 나는 그의 고독과 함께 걷는다. 당당하지도 취약하지도 않은 그의 모습은 ‘홀로 고독하게’ 늙어가는 노년의 모델이다.

도움은 먼 과거에서 오는가 하면 몇 달 전이나 지난 주 쯤 오기도 한다. 아버지가 글을 못 배우게 해서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마다 재를 긁어모아 그 위에 부지깽이로 ‘가’자나 ‘나’자를 써보며 글자를 배운 소녀가 있다. 이 소녀는 67살에, 남편도 시어머니도 다 저 세상으로 떠나고 드디어 혼자가 되었을 때, 공책을 사서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부지깽이로 배워 삐뚤빼뚤 미운 글씨가 일기를 쓰다보면 좀 예뻐질까 해서였다고 한다. 아흔일곱이 될 때까지 그는 30년 동안 계속 일기를 써 왔다. 《아흔일곱 번의 봄여름가을겨울》의 ‘저자’ 이옥남의 이야기다. 

 

이 책은 새벽부터 밤중까지 ‘진심으로 충실하게’ 삶을 사는 한 ‘늙은 여성’의 모습을 증언한다. 그의 일기 쓰기는 농사짓는 일과 떨어져 사는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과 마을 사람들과 맺는 관계를, 성찰의 내적 공간에서 이옥남이라는 한 개인의 ‘자아’ 이야기로 합류시킨다. 농사지으면서 경험하는 자연에 대한 이야기가 세세하고 따뜻한 건 그가 ‘관찰’을 하고, 또 관찰한 것을 자아의 경험으로 의미화하기 때문이다. 일기쓰기가 그에게 외부와 날것의 즉자적 자기 사이에 내면이라는 공간을 열어준 것이다.

오늘은 나 불보는 차례인데 비가 온다

비가 오는데 뭔 불이 타랴, 일부러 싸놔도 안 타겠지

그래도 맡은 책임이 있는데 집 안에 들어앉아 있을 수도

없고 책임대로 하느라 마을 회관에 갔다

마을 회관에 갔더니 젊은 사람들한테 꾸지람만 들었다.

비 오는데 누가 불 싸놓는다냐고. 이런 날은 불 봐야 

일당도 안 나와요 한다. 도로 내가 미안해서 부끄럽고

내가 왜 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책임 때문에 왔지

무슨 일당 때문에 왔나. 왜 오나가나 핏퉁아리나 들으면서

살아야 되나. 이내 집으로 내려오고 말았다.

날씨조차 속을 썩히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세빠또1)가 와가지고 딱 듣기도 싫은

말만 떠들다가 가고 이제 이 글을 쓴다. 
 

 

‘불보기’라는 제목이 달려있는 일기다. 책임을 다하려다 젊은 사람에게 오해를 받으니, 그것도 돈 욕심으로 오해를 받으니, 억울하기 짝이 없다. ‘불보기’는 억울한 심정의 자초지종을 기록하고 있지만 주조음(主調音)을 이루는 것은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 충실히 살고자 하는 그의 인생태도다. 그가 하루하루 채워나간 공책 페이지에서 우리는 충실하게 ‘살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지만, 동시에 충실하게 ‘살고자 하는’ 그의 모습도 본다. 이 점이 《아흔일곱 번의 봄여름가을겨울》을 뛰어난 인생 성찰의 텍스트로 만든다. 늙어가는 나 같은 사람에게 기분 좋은 모델이 되어준다. 나이가 몇이 되었건 ‘진심으로 충실하게’ 사는 삶, ‘진심으로 충실하게 살고자 하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 삶은 노년의 여행길을 밝히는 소중한 반딧불이다. ​

 

https://youtu.be/JxWojOivK-U

 

 

​2. 늙은이의 삶, 좌절도 있고 유머도 있다 : 정신적 탄성의 빛나는 유머를 향하여

​여러모로 배울 점이 아주 많은 책 《나이듦에 관하여》를 읽다보면 거듭 확인하게 되는 인식론적 전환이 있다.

사람들의 편견이나 오해와는 달리 80, 90대 노년들이 일상에서 보이는 ‘무능’은 단순히 생물학적 이유만은 아니며, 오히려 이 세상이 청년기와 중년기를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연스런 노화’와 ‘질병’을 구분하는 일은 매우 어렵지만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오십대 후반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병원 가는 일이 심리적으로 모독이 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증상이나 병의 원인, 그리고 통증의 진행 과정 등에 대해 상세하게 ‘의료-과학적’으로 알려주지도 않을뿐더러, ‘돌보는 의료’ 차원에서의 상담이나 의논은 꿈도 꿀 수 없기 때문이다.

 

어디가 어떻게 안 좋든 간에, 어떤 진료과를 방문하든 간에 늘 듣는 말은 ‘노화인 거죠’이니, 이 요약정리 버전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다보면 자기 몸의 탐구에 대한 동기부여는커녕 무력감만 커질 뿐이다. 사회문화와 의료계의 관행에 의해 강요되고 학습된 이 무력감은 종종 우울감으로 이어지고, 또 심한 경우에는 수치심을 낳기도 한다. 그런데 노화의 현실은 이와 다를 수 있다! 노인/임상의학과 의사로서 수십 년간 80, 90대 노년들을 ‘의료적으로 돌봐온’ 루이즈 애런슨이 《나이듦에 관하여》에서 방점을 찍는 것은 이 연령대에서 발휘되는 놀라운 ‘정신적 탄성’이다. 86세에 접어든 그의 어머니는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아침에 수행해야 하는 일련의 일들을 이렇게 소개한다. 

아침에 할 일이 너무 많아. 일단 건조한 눈에 안약을 넣어야하고, 아직 빈속일 때 갑상선 약을 바로 챙겨 먹어야 해. 

그래도 이것저것 하다 보면 1시간이나 더 있어야 아침을 먹긴 하지만. 어쨌든 다음 차례는 그릇을 받치고 비강 세정을 

한바탕 하는 거야. 안 그러면 하루 종일 콧물이 흐르고 기침이 나거든. 얼굴에는 딸기코를 가리는 보정 크림을 발라. 

그뿐인가, 스트레칭을 한참 해서 굳어있는 관절 마디마디를 풀고 돌아가게 만들어야지. 그러고 나면 보청기를 찾아서 

귀에 끼고 핀으로 머리에 고정해야 해. 잘못하면 보청기선 때문에 안경을 뒤에 걸칠 수가 없더라고. 눈 뜨면 세수만 하고 

하루를 시작했던 시절이 마치 꿈만 같구나.2)

 

​​《나이듦에 관하여》는 80,90대의 노년들이 발휘하는 놀라운 정신적 탄성에 대해 주목한다. 

 

 

​오해하지 말자. 이 말들은 투덜거림도 푸념도 무력감의 호소도 아니다. 이런저런 세상사에 논평을 달아가며 80대 후반의 일상을 충실히 살고 있는 한 노년여성의 ‘자기 돌봄’ 기록이다. “나는 지금 절전 모드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거야.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최대한 해 보려고” 이것이 그가 채택한 일상 유지 전략이다. 이 전략을 오로라처럼 감싸고 있는 유머의 빛이 사랑스럽지 않은가. 

​88세에 시력을 잃고 시각 장애인의 삶을 새로 ‘배운’ 독서광 클리프턴 파디먼의 사례도 놀라운 정신적 탄성으로 빛난다. 독서광이었던 그는 고령에, 불편한 몸에, 이제 시력까지 잃는다니 더 이상 살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딸 앤 파디먼 Anne Fadiman은 6개월만 시간을 갖자고 애원했고, 시각 장애인을 위한 프로그램에 다녀온 그의 첫 반응은 “살아생전 최고로 흥미로운 경험”이라는 고백이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이제는 볼 수 없다는 고통스런 현실에 직면하면서도 그는 생의 마지막 날까지 오디오북으로 책읽기의 즐거움을 누렸다. 

정신적 탄성은 고통스런 현실이 주는 슬픔이나 좌절, 분노에 면역이 되어서 가능한 게 아니다. 똑바로 직면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낙관과 비관 사이에서, 가능과 불가능 사이에서, 욕망과 포기 사이에서, 자립과 의존 사이에서, 자아와 타자 사이에서, 자존심과 수치심 사이에서 ‘흔들리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 모든 균형 잡기에서 그때그때마다 ‘적절한 감각’으로 이끄는 힘은 물론 일시에 이루어진 선택의 결과가 아니다. 살면서 그 끈을 놓지 않았던 ‘삶과 죽음의 의미’, 타자들과 시도했던 무수한 연결의 시도들이 바로 그 힘이다. 늙어서 갑자기 누리는 ‘자기결정권’ 같은 건 없다. 늙는 일의 선행학습은 ‘나 이제 정말이지 아주 늙어버렸네’라고 절감하는 그 순간까지 평생 진행되어 온 것이다. 


 

  

노년세대와  비노년 세대의 이야기를 소개하며, 언젠가는 늙음을 느낄 이들에게 희미하지만 효력 있는 선행학습이 되길 희망했다. ©cristian-newman- on splash

 

 

​드라마 <눈이 부시게>는 아나운서 자질이 별로 ‘없지만’ 자신을 ‘애틋하게’ 여기는 청년 혜자와, 늙어 쭈그렁망태가 ‘되었지만’ 자신을 ‘애틋하게’ 여기는 치매노년 혜자가 같은 사람임을 알려준다. 이 애틋함은 ‘니가 애틋해’라는 타자지향의 간절함과 솔기 없이 이어져 있다. 7회에 걸쳐 애틋함으로 이어져 있는 노년 세대와 비노년 세대의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나는, 이 이야기들이 지금 늙음을 느끼는 이들에게, 지금은 무감각하지만 언젠가는 늙음을 느낄 이들에게 희미하지만 효력 있는 선행학습이 되길 희망했다. 칼럼을 쓰는 시간은 평등하지 않은 코로나 ‘재난’을 목격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노인요양시설에서 집단감염의 희생자가 된 많은 노년들을 떠올린다. 격리 속에서 생을 마감했을지라도 그 분들의 마지막 전언이 ‘충분히 좋았다’였기를 기원한다. 누군가와 ‘애틋하게’ 연결되어 있었을 그 분들의 이야기를 언젠가는 누군가 들려줄 것이다.​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김영옥 대표.

 

 

노년과 비노년 세대의 이야기를 애틋한 타자지향이라는 렌즈를 통해 들여다보고 

나이듦에 대해  함께 성찰할 기회를 제공해주었던 <나는 니가/내가 애틋해>가 연재를 마칩니다. 

​함께 읽고 공유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1) 이옥남 (2018), 아흔일곱 번의 봄여름가을겨울》, 양철북, 32쪽. 세빠또는 동네에 사는 또 다른 ‘독거노인’이다.

​2) 루이스 애런슨 (2020), 《나이듦에 관하여》, 최가영 옮김, Being, 680-6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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